공모전 수상작

[대상] 한솥과 함께 해피엔딩

배재대앞점
배재대앞점

저는 오늘 아침에도 6시면 눈을 뜹니다. 
벌써 17년째 계속되는 제 일상입니다. 그래도 이제와 생각해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간들이 보람과 행복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서울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전에 내려온 것은 1990년도 저의 큰딸이 태어나던 해였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 서른다섯. 사업을 하기에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나이였습니다.
과천에 살고 있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대전에서 차량에 관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제가 부족했던 탓일까요?

첫 사업에 품었던 저의 기대와 달리 사업은 날이 갈수록 기울어만 갔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빚은 계속 늘어만 갔고 살던 집마저 처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나빠졌다고 생각했던 몸 상태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어 병원에 가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건강검진 결과 대장암 확정 판결을 받았고, 수술 후 길어야 1년 정도 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판정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아무 재산도 없이 저의 처, 6살, 7살된 천사 같은 두 딸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내가 없어도 무언가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간절했지만, 저에게는 아픈 몸과 빚만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소기업 창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여의도로 갔습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나와 있었지만 유독 저는 ‘한솥도시락’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나마 저 없이도 제 처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창업비용, 미래성장성 등을 꼼꼼히 고려하며 한번 실패했던 경험을 살려 '아! 이 사업은 정말 순식간에 대박이 나진 않겠지만, 꾸준한 성장 가능성이 있고, 나 없이도 아내 혼자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쌀, 김치는 물론 고춧가루 하나까지 국내산을 사용하는 건강한 식재료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대장암 판정을 받다 보니 그간 나의 식습관이 잘못되었나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업박람회에서 설명을 들으면서 한솥은 가격은 저렴하지만 신선한 국내산 식재료를 사용하고, 조리부터 완재까지 청결함을 중시하는 바른 먹거리란 생각에 믿음이 갔습니다. 

두 어린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착잡한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솥 도시락 창업을 준비했습니다. 마침 대전에서 기존에 한솥 도시락을 하고 계신 분이 있었고, 저는 더욱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확신을 가진 후 저는 속전속결로 계약을 하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대장암을 수술한지 3~4개월 밖에 되지 않아 교육을 받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저의 의지와 본사의 배려로 교육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3월, 저는 드디어 한솥도시락 도마점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오픈 첫해부터 저와 제 처, 저의 주변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번의 실패를 경험한 탓에 큰 기대는 갖지 말자하고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일일 100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장사가 잘됐습니다. 
지금 100만원의 가치와 그때의 100만원 가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운 좋게도 급식소가 없던 고등학교, 주변 대학교의 대량 주문과 도시락이라는 아이템에 대해 신선함을 느낀 손님들 덕에 앉을 틈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바쁘고 즐거운 시간이 계속되면서 제가 암 수술을 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환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한 해가 훌쩍 지나갔고, 저는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있었습니다. 

1년만에 모든 투자비용을 전부 회수해 3년 후에는 40평짜리 아파트도 장만하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두 딸들을 캐나다로 어학 연수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성공을 보고 저의 둘째 형님, 제 조카 그리고 누나의 시동생까지 한솥도시락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특히 저희 형님은 한동안 전국 톱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저희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고등학교가 자체 급식으로 전환되고 저희 가게가 세 들어 있던 건물이 철거되는 바람에 저희는 다른 곳으로 가게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투자비용이 발생하였고 원래 점포가 있던 중심지에서 한참 떨어진 장소였기에 매출은 반의 반 토막까지 떨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호황기 때 샀던 주식들이 급락하여 투자한 돈도 거의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듯 다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거리 근처에 새로운 자리가 생겨 다시 이전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다시 안정적인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가게는 주말이 되면 단체 주문이 많아 서울로 대학을 간 두 딸이 매주 대전으로 내려와 도와줄 정도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좋은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을 가니 협심증이라 하여스텐트(그물망)을 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암 수술 병력을 확인한 의사가 위내시경을 권하여 검사를 받아보니 진단 결과 위암 3기 말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의사는 스텐트를 심게 되면 혈액이 묽어지는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1년간은 위암 수술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점점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암세포는 이미 림프절까지 전이되었고 정말 이번에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낙심하고 있던 저에게 의사인 누나는 서울로 가서 다시 진단을 받아보자고 권했고, 저는 다시 서울에 있는 큰병원으로 가 수술을 시켜달라 무작정 매달렸습니다. 위는 3분의 2 이상 절제하였지만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치료는 다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던 때 항암치료라는 또 한번의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큰딸은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작은딸은 주말마다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제 아내와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80kg 이상 나가던 체중이 30kg이상까지 빠지고 응급실을 안방 드나들 듯 할 정도로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복부로까지 암이 전이되어 경구용 항암제는 효과가 없어 주사용 항암제로 바꾸면서 저는 머리카락 하나 없는 민 대머리에 몸에 있는 털이란 털은 다 빠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더니 복부로 전이된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다시 삶의 희망을 가지고 가발을 맞춰 쓰고 가게에 출근했습니다. 지금은 한번 수술하면 15년은 거뜬하니 70살까지는 무난할 거라며 친구들과 농담까지 할 정도로 건강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목숨, 이렇게 안주하며 살기 싫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 뛰어야 한다고 저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제가 두 번의 암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이 바로 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솥은 ‘따끈한 도시락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한다’는 슬로건처럼 저에게 있어 제 몸을 지킬 수 있게 해줬고, 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해줬습니다. 그리고 17년간 한결 같이 저희 매장을 찾아준 고객들에게 따끈한 도시락을 제공하면서 제 몸과 마음도 치유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마침 배재대 앞에 좋은 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저는 대전사업본부에 점포를 하나 더 내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두 달 사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올해 2월 배재대앞점을 마침내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통했습니다. 시작부터 배재대앞점에는 손님들이 밀려들었고 우리 점포를 중심으로 주위에 깔끔한 점포들이 들어서며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방학 때는 매출이 조금 떨어지기도 방학이 끝난 9월을 위해 재충전과 조금 쉬어가는 걸로 생각하려 합니다. 이쪽이 쉬면 또 저쪽 매출을 늘리면 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힘이 됩니다. 

저의 큰딸은 배재대앞점 점장으로 저의 작은딸은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와 도마사거리점과 배재대앞점을 오가며 큰딸과 환상적인 짝꿍을 이뤄가며 가게를 이끌고 있습니다. 도마사거리점과 배재대앞점은 우리의 미래며 희망입니다.
한때 모든 걸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당시 두 딸을 생각하며 한솥을 시작했던 제 선택이 옳았다고 자부합니다. 죽음의 문턱을 두 번이나 넘나들면서도 날 지켜준 건 두 딸과 변함없이 찾아주신 ‘한솥도시락’ 고객들이었습니다. 암이란 귀찮은 존재가 날 더 귀롭힌다 하더라도 나의 가족과 한솥도시락이 옆에 있는 한 이겨낼 자신이 있습니다.

한솥도시락을 하며 바빠서 해외여행 한번 못 갔는데 올 여름에는 힘들게 일한 두딸과 처, 그리고 저를 위해 넷이서 일본 대마도로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365일 쉬는 날 없이 일하면서 힘든 날도 많고, 그만두고 싶단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한솥도시락과 함께한 17년의 인연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솥 본사와 도와주신 대전사업본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Ps.저는 아직도 머리가 제대로 나지 않아 항상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30년 정도는 모자를 쓰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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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전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