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수상작

[최우수상] 한솥밥 엄마

파주교하점
파주교하점

“한솥 밥 엄마”

1993년 8월 어느 날 마을버스를 타고 신촌 연대앞을 지나가는데 노란 간판에 따끈한 한솥도시락 간판이 눈에 띠었습니다.

진열장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진열되어 있어 오고가는 이들의 눈길을, 입맛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물론 진열장안의 음식이 모형이라는 건 곧 알게 되었지만요. 전 그저 “이렇게 이쁜 가게도 있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지나치려던 저의 눈길에 “함께 일할 사람 구해요” 라는 구인 광고를 보게 되었고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전화를 해 보았더니 생각지도 않게 당시 점장님께선 내일 만나서 면접 한 번 보자는 약속을 흔쾌히 해 주셨답니다.

당시 전 세 아이의 엄마며 살림만 하던 전업 주부였기에 면접이라는 단어도 생소 하였고 가면 잘 할 수 있을까? 아직 면접에 합격을 한 것도 아닌데 이미 합격을 한 것처럼 밤잠을 설치며 다음 날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남자 점장님께선 별다른 질문 없이 내일부터 출근해서 함께 일해 보자는 말씀을 끝으로 저의 생애 첫 면접은 약간은 싱겁게 끝났고 면접 다음 날“신촌점 한솥도시락 2호점” 여기서부터 저의 한솥도시락 20년 지기가 시작 되었답니다. 

당시 여사님3분과 저를 포함해서 4명은 정말 바쁘다는 말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며 하루 120만원-15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며 으싸으싸 생애 첫 직장에서의 신고식을 나름 보람차게 치르게 되었답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하던 어느 날 일하다 보니 밖에 이영덕 사장님이 오셔서 웃음기 있는 하얀 얼굴에 “고생하십니다.” 하며 격려 해 주시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 이후로 저는 신촌점에서 2년 정도 근무를 하고 당산점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고 당산점 역시 일일 매출이 100만원-130만원 정도의 무척이나 바쁜 지점이었답니다. 

당시 저의 집은 서대문구여서 당산점까지 다니기가 정말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함께 일하는 여사님 점장님들이 좋아 2년을 다니게 되었지만 출퇴근 시간이 항상 마음에 걸리던 저에게 명지대지점에서 일할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에 다행히 명지대지점에서 1년 근무를 할 수 있었답니다.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내 던 어느 날 저의 신랑이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 했습니다. 저는 딸 둘에 늦둥이 아들하나 그리고 신랑과 저 이렇게 다섯 식구로 퇴직금 받은 것을 몇 달 쓰다 보니 이천만원 딱 남더라구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식들 공부 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살 수 있나? 이런 저런 생각에 정말 피가 바싹바싹 말랐습니다

돈 이천만원으로 과연 무엇을 할수 있을까? 몇 날을 꼬박 고민만 하던 저에게 
명지대 점장님께서 “나도 오천만원 대출 받아서 인수 받았어요 여사님도 한번 해 보세요. 

여사님은 그때 저보다 훨씬 경험도 많으시고 누구보다도 성실하시니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생각 해 보면 그 한마디가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것 같습니다.

전 두번 생각도 하지않고 한솥 본사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받아 보았고 당시 담당 슈퍼바이저가 박태준씨였는데 그분에게 “무조건 하고 싶고 해야만 한다고” 벼랑 끝에서 옷자락이라도 잡는 절박함을 말씀드렸습니다

담당자님은 너무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시고 점포 이곳저곳을 알아봐 주시던 중 북아현동에 점포가 나온게 있다고 해서 같이 가 보았더니 맘에 들더군요. 바로 옆에는 한성 중고등학교와 중앙여고, 추계예대도 있었으며 주민들도 아주 많이 다니는 도로 앞 점포였습니다.

한솥도시락을 계약하려면 6500만원이 있어야 했지만 제가 가진 돈은 2000만원 4500만원이 부족한터라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기에 저는 친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해야 했고 처음 빌리는 돈이라 덜컹 겁이 나고 안 빌려 주면 어쩌나 신랑도 놀고 있는데 오만가지 걱정을 하는 저에게 친구는 고맙게도 돈을 빌려 주었고 많은 말을 나누지 못 했지만 정말 열심히 일해서 반드시 갚을께라는 눈인사만 연신하며 돈을 받아 쥔 저는 바로 계약을 하고 본사에 가서 신입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남보다 조금 더 부지런히 점포 앞을 깨끗이 하고 손님에게 친절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한성고점 한솥도시락 간판을 올리고 1998년 8월 오픈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인 한솥 도시락을 오픈하여 하루 매출이 60만원-70만원이 나와 1년 만에 친구의 돈도 갚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한성중학교가 급식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학교였고 그런 터에 저의 한솥이 오픈 했으니 어머님들 학생들이 얼마나 좋아 했겠어요? 

그때부터 학생들한테 급식신청을 받기 시작 했어요 아무런 조건 없이 청결하고 맛있는 도시락을 학생들에게 배달해 주라고 교장선생님께서 당부 하셨고 저 역시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매일 4시에 일어나 준비하며 7시에 여사님들이 오셔서 550개 많을 때에는 600개의 도시락을 싸 학교까지 가서 학생들 한명 한명에게 쥐어 주는 이때부터“한솥밥 엄마”로 우리 학생들에게 불리게 되었답니다. “많이 주세요.” “맛있게 해 주세요” 가끔 그때를 돌이켜 보면 아직도 귓가에 학생들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온힘을 다해 도시락을 싸던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입이 돌아가고 눈이 안 감기고 말이 잘 안 나오는 안면 마비가 온 거예요. 너무 놀라서 경희대 한방병원에 갔더니 수면부족과 과로로 온 안면마비라 당분간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저는 무조건 “안돼요. 전 학생들이 도시락 기다리고 있어서 밥 해줘야 해요” 하며 떼아닌 떼를 쓰며 의사선생님과 타협 아닌 타협을 보고 성실하게 통원치료를 받았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도시락을 쌌어요. 학생들이 “한솥밥엄마 최고에요” 라는 한마디에 저는 힘이 들어도 힘든게 아니었고 아파도 안 아팠답니다. 정말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았습니다.

2011년 북아현동 1동이 뉴타운으로 확정이 되었고 13년 동안 정 들었던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학생들 주민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내 자식같은 학생들이 “그럼 우리밥은 누가 해줘요?” 할 때마다 전 “인연이 있으면 또 다시 만날 거야” 라는 말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습니다. 학교에 가서 인사를 하고 내려오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이곳에 처음 왔을때는 분명 “한솥밥 엄마”였는데 떠날때는 어느 덧 “한솥 밥 할머니”가 되었네요. 저는 그길로 가게로 와서 정말 목 놓아 “엉엉” 울었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를 생각 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어느 덧 제 나이 62세 이제는 장성한 자식들이 “엄마 돈도 많이 벌었으니 이제는 일 좀 그만하시고 쉬세요. 엄만 일 중독증이야.” 하며 걱정반 핀잔반 섞인 말을 번갈아 가며 제가 잊을 새라 이야기 하지만 전 그때마다 “아니야 일 할 수 있을 때 일 해야돼 앞으로 5년만 더 할게” 하면 딸들은 이에 질세라 “그럼 한솥 말고 다른 거 하면 어때? 매일 도시락 싸는거 지겹지도 않아?” 딸들 말에 과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치킨? 분식점? 제과점? 몇 군데 딸들의 성화에 알아 보았어요. 그래도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한솥 뿐이더군요. 그래서 다시 수퍼바이저를 만나서 점포를 알아 봐 달라고 했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아들 같은 백인옥 바이저님과 함께 새 점포 개업을 준비 하게 되었습니다. 

준비하면서도 바이저님 역시 제가 꼭 자기 엄마 같다며 “꼭 하셔야겠어요? 일 그만하시고 쉬세요” 하며 걱정 해 주시는 거예요.. 

그때마다 전 우리 딸들에게 했듯이 “딱 5년만 더 할 거야” 하며 여기저기 알아 보는데 서울은 권리금 집세가 너무나 많이 들어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론 어림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개발부 서과장님께 “저는 일억 밖에 없어요. 더 이상은 힘들어요.”하며 조언을 구한 후 몇 칠 기다리고 있자니 경기도 파주는 어떠냐하고 전화가 왔어요. 차를 타고 가는데 왜 이리 먼지~ 와 보니 중심 상가에 아파트 단지가 많고 옆에 롯데리아가 있고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많아 맘에 들었습니다. 2011년 6월 파주까지 오기로 결정 한 후 일사철리로 예쁘게 정성스럽게 인테리어를 마치고 드디어 6월 26일에 파주 교하점 “한솥 도시락” 간판을 올리고 오픈을 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파주교하에도 한솥 도시락이 생기네 하며 학생들 주민들이 신기 해 하며 많이 찾아 주셨어요. 

정말 바빴어요. 오픈 다음 달인 7월 매출 4400만원 8월 5500만원 정말 저 자신도 놀랐어요. 단체 주문도 많았고 연일 줄을 서 있있는 손님들을 보며 너무 행복 했습니다.
작년 구정 전날 전화가 왔습니다. 출판단지인데 설날 아침에 도시락을 좀 싸 주면 안 되는지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밥 먹을 곳이 없다는 말에 저는 걱정이 되기 시작 했어요. 

제가 큰 며느리이기에 차례를 지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차례만 아니면 해드리는데 어떻하나 고민 끝에 가게에서 일찍 차례를 지내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가족들은 아무도 안 왔어요. 저 혼자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하고 마음 속 깊이 사죄드리며 차례를 지냈습니다. 

냉동고 위 셋팅하는 곳에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치려 놓고 보니 제법 근사하더라고요. 아주 멋졌어요. 그래도 저의 신랑은 무척이나 서운 했던지 “평생 한솥이나 해라” 하며 화를 내더라고요. 

전 서러웠지만 제가 싸는 도시락을 기다리는 50명의 손님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도시락을 준비 했습니다. 눈물의 도시락임을 아는지 출판단지손님들은 연신 고맙다며 뜨끈하게 담겨진 50인분의 도시락을 너무도 행복해 하며 맛있게 먹는 모습에 또 다른 행복을 맛 보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거예요. 밖에 이영덕 사장님이 직원분들과 함게 오신 거예요. 

전 정말 기쁜 마음으로 밖으로 나가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혹시 기억하세요? 저 신촌점에 근무 했었고 한성고점에도 근무 했었는데~~ 사장님 13년 만에 뵙네요. 세월은 어쩔 수 없나봐요. 사장님 머리에도 흰머리카락이 보이시고 얼굴에 주름이 많이 생기셨어요. 사장님 처음 뵈었을 땐 저두 40대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20년이 흘러서 60대가 되었으니 왜 안 변했겠어요.

사장님 저도 62세 할머니가 되었어요. 고등학생 이였던 첫 딸이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저두 할머니예요. 사장님 20년이란 시간이 저에겐 참으로 빨리 지나간 것 같아요. 

제가 남의 밑에서 5년 점주 입장에서 15년 열심히 일하고 산 것 뿐인데 20년이 지났잖아요?“

13년 만에 뵌 사장님이 어찌나 반갑던지 20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군요. 그간 거울을 찬찬히 들여 다 볼 겨를도 없이 일만 하다 보니 지금 와 들여다 본 거울 속엔 40의 아줌마는 어디가고 60의 할머니가 저를 바라 보고 있네요.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하루도 손에 물기 마를 날 없이 지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굽어진 나의 손 마디마디를 보며 “에고 손아 니가 주인을 잘 못 만나 고생이 많다”하며 슬프기도 자랑스럽기도 한 나의 손를 쓱쓱 문질러 봅니다. 

20년 전 퇴사한 신랑만 원망하며 주저 앉았을지 모를 저를 아니 우리 다섯 가족을 살게 해준 사장님께 저는 늘 감사드려요. 덕분에 우리 아이들 대학까지 공부 시키고 우리가족 두 다리 쭉 펼수 있는 34평 아파트와 상가 그리고 저의 평생 일터 

한솥 파주교하점까지 마련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신분이니 은인이 맞으시죠? 
이 정도면 저 성공한 거지요. 손님들께 친절하고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저는 늘 행복했습니다. 

욕심쟁이라고 흉보셔도 저 이 후로도 힘닿는 날까지 뜨끈한 도시락 싸면서 저 늘 행복할려구요. 이영덕 사장님 저처럼 20년 지기 한솥도시락 친구가 있으니 늘 파이팅 하시고 건강하세요. 


한솥 도시락 파주교하점 방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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